거위를 잡아먹는 대신 계속 황금알을 낳도록 키우려는 것이었다.
왜 한 쪽 방향으로만 확산해 나갔는지 의문이 따른다.류구 조정 내의 친일-친중 대립을 말하기도 하는데.
사상계에서 구메무라의 역할이 워낙 크고 경제면에서 중국과의 관계가 워낙 중요했기 때문이다.10세기경까지는 인도양과 남중국해 교역활동의 주역이 남양인이었다.이웃의 작지 않은 나라를 아주 무시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실제로는 류구의 번영을 탐낸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류구에 대한 일본의 관심은 배경의 중국 때문이었고.
북쪽 절반은 사쓰난(薩南·사쓰마의 남쪽이란 뜻) 제도라 하여 가고시마현에 속한다.
타이완을 ‘소(小)류구로 적은 기록이 14세기까지 중국에서 나타난 데서 그 시대 타이완의 존재감이 얼마나 빈약했는지 알아볼 수 있다.실제로는 류구의 번영을 탐낸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서로 멀지 않은 위치에 있는 타이완과 류구 중 대륙에서 가깝고 덩치도 큰 타이완보다 류구가 역사의 무대에 먼저 등장하고 더 화려한 배역을 맡은 사실이 일견 뜻밖이다.타이완은 이 어족 분포 지역의 중앙이 아니라 경계선 위에 있다.
사상계에서 구메무라의 역할이 워낙 크고 경제면에서 중국과의 관계가 워낙 중요했기 때문이다.10세기경까지는 인도양과 남중국해 교역활동의 주역이 남양인이었다.